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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의 위기의 역사(1) : 1970년대 오일쇼크, 1980년대~1990년대 초 3저 호황, 재벌 중심 대기업의 몰락, 그리고 엔저 불황경제 기초 2024. 3. 29. 17:13
앞서 대부분의 경제가 움직이는 곳에서는 경기의 상승과 하강을 경험하고 있다고 공부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기 순환도 공부할 필요가 있겠죠? 이번 포스팅에서는 한국의 경기 흐름과 위기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970년대 오일쇼크
우리나라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돌입하고 처음으로 경험한 세계 불황은 1973년 1차 오일쇼크, 1979년 2차 오일쇼크일 것입니다. 원인은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인들 간에 벌어진 중동전쟁입니다.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의 중동 국가들은 원유의 시추와 판매를 독점적으로 주도하는 국가들에 대항해 1960년 OPEC(Organization of Petrolem Exporting Countries, 석유수출국기구)를 결성합니다. 그리고 중동 원유 생산과 판매는 아랍이 독자적으로 결정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이후 유가 조작으로 사사건건 서방 국가들과 충돌했습니다.
1973년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미국과 가까웠던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충돌로 영토 분쟁이 일어났는데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아랍 국가들은 원유 수출을 차단했습니다. 당시 국제 유가는 급상승해 원자재인 원유가 치솟으니 서방 선진국들의 물가 또한 급등해 경제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유가가 오르니 원유로 상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기업들도 충격을 입었으며 가계와 국민경제 또한 경기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1979년 불황 또한 중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엔 이란입니다. 1970년대까지 거의 20년에 걸쳐 친미 정책을 펼쳤던 팔라비 왕조가 1979년 이슬람 시아파 호메이니를 필두로 한 이슬람 혁명에 무너지면서 급격하게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적대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압박으로 이란은 보복성 원유 수출 통제 정책을 펼쳤고 다른 중동의 산유국들도 이란을 따랐습니다. 유가가 또 폭등했고 1980년대 초 전 세계는 스테그플레이션의 늪에 빠졌습니다. 여기서 스테그플레이션이란 물가 급등과 경기 침체가 함께 진행되는 최악의 경기 상황입니다. 스테그플레이션과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에 대한 설명은 추후에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19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우리나라 또한 경제적 타격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2차 오일쇼크가 발생하기 전에 우리나라는 중화학 공업 중심의 경제 개발이 진행되는 상태였고 오일쇼크가 발생한 직후 경제 성장률은 1979년 8.7%에서 1980년 -1.6% 즉,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1980년대~1990년대 초 3저 호황
두 차례의 오일쇼크 후 한국의 경제는 빠른 수준으로 회복했습니다. 1980년대는 ‘3저 호황’을 맛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 3저는 유가, 국제금리, 원화 시세 이 세 가지 지표가 낮은 수준을 기록했음을 의미합니다. 유가, 금리, 원화가 낮아졌는데 왜 경기 호황이 찾아온 것일까요?
먼저 유가가 낮아지면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제품의 제조 비용이 줄어듭니다. 석유는 제품의 생산, 유통, 판매 모든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로 하는 원료입니다. 전기를 생산하는 데에도 석유가 들어가며 이를 차량과 선박을 통해 운반하는 과정에서도 석유는 필수적입니다. 즉, 석유의 가격이 낮아지면 기업은 생산 원가를 줄일 수 있고 제품을 더 싸게 판매할 여력이 생겨서 가격 경쟁력이 생깁니다. 기업은 더욱 많은 제품을 판매할 수 있으며 그만큼 투자와 고용이 원활하게 이루어져 경기는 점점 좋아집니다.
유가가 낮아진 배경에는 오일쇼크가 있습니다.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는 전 세계에 더 이상 중동의 원유에 의존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중동이 아닌 다른 석유 구입처를 모색하거나 적극적으로 유전 개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본 OPEC은 중동의 원유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국가들이 늘어나 원유 시장의 주도권이 빼앗길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원유를 증산하고 유가를 낮추게 됩니다. 이로써 1980년 초 배럴 당 유가는 5년 사이에 대략 두 배 정도로 대폭 떨어집니다.
두 번째로, 금리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국제 금리가 낮아지면 기업들은 이자율이 더욱 낮은 대출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습니다. 투자를 하거나 사업을 확장하기에 매우 좋은 시기입니다. 이로써 생산이 늘어나며 고용 지표 또한 향상할 수 있게 됩니다.
1980년대 저금리 상황은 미국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파동에 미국은 물가를 잡기 위해 시장 금리를 올리는 정책을 단행합니다. 원래 경기가 악화되면 금리를 낮춰 민생 경제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금리를 올리게 되면 사람들은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게 됩니다. 이는 물가를 서서히 내리게 만드는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물가가 어느 정도 잡혔다고 생각한 미국은 1980년대 중반 경기 부양을 위해 저금리 정책을 폅니다. 미국의 저금리 정책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금리 인하 기조를 만들어 내고 글로벌 금융시장은 유례없는 호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볼 지표는 원저입니다. 원화가 낮아지면 무역량이 내수 경제보다 규모가 큰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원화가 달러 대비 시세가 낮은 상태에서는 달러의 가치가 더 높습니다. 따라서 기업들이 상품을 수출하면 달러를 받는데 이를 원화로 환전하면 원화 가치가 높을 때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습니다. 원저는 우리나라 수출시장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약 동일한 제품을 수출한다고 했을 때, 수출품의 가격을 주변의 다른 국가들보다 더 저렴하게 판매할 수 있는 경쟁력도 갖추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원화의 시세가 내려갔을까요? 당시 미국은 커져가는 무역적자에 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미국의 무역적자가 늘어난 이유는 제조업 강국인 일본과 독일의 수출품 경쟁력이 강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두 국가를 끌어들이기로 합니다. 미국이 무역에서 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달러 시세를 약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국의 통화 가치가 약해지면 상품 수출에 가격 경쟁력이 생겨 이론적으로 수출을 늘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미국, 독일, 일본 삼국은 1985년 미국의 플라자 호텔에 모여 통화 시세를 의도적으로 조정하는데 합의를 봅니다. 이렇게 플라자 합의를 통해 미국은 마르크화와 엔화의 시세를 높여 달러 가치 절하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엔 시세가 높아지니 우리나라는 반사 이익으로 수출 여건이 유리하게 만들어집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경쟁하는 동종 품목에 대해서 수출량을 크게 늘릴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이런 3저 호황의 동력으로 기업들은 투자와 생산을 확대해서 무역량을 더욱 증가시켰고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 또한 개선되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베스트셀러인 포니가 미국의 수출이 이루어진 것도 1986년 3저 호황을 맞았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호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경기는 점점 하강하기 시작합니다.
재벌 중심 대기업의 몰락, 그리고 엔저 불황
불황 때도 살아남는 건전한 기업이 되려면 호황 때 대비를 해야 합니다. 경기가 좋을 때 기술과 인력풀에 투자해서 생산성을 높이고 제품의 퀄리티를 높여야 합니다. 하지만 3저 호황 때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불황에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풍작의 시기에 기술 투자가 아닌 주식과 부동산에 대거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기업 경영은 크게 수익 위주의 경영과 외형 위주의 경영으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수익 위주의 경영은 양보자 질을 강화하는 경영입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고급 인력과 고부가 가치 설비에 투자해 비용 대비 많은 수익을 만들어냅니다. 외형 위주의 경영은 질보다 양을 향상하는 경영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값싼 제품을 대량 생산해서 단기적인 시각에서 매출을 키우고자 하는 방향의 경영입니다. 외형 위주의 경영은 기업 부채로 자산의 규모를 키우고자 해 실속은 없지만 덩치만 불리려고 하는 고비용, 저효율 경영 방침입니다. 이러한 기업 경영은 재정 건전성을 약화시키고 불황에 취약하게 만듭니다.
1990년대 중반이 되자 3저 호황에 제동이 걸립니다. 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 약세 정책을 펼친 미국이 강달러 정책으로 돌변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정책을 바꾼 이유는 플라자 합의를 했음에도 미국의 무역 흑자로 쉽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단순히 달러 시세를 건드는 것만으로 독일과 일본의 경쟁에서 밀리는 미국의 제조업 구조를 바꿀 수 없었습니다. 이때 미국은 클린턴 정부의 재무장관 루빈을 필두로 강달러 기조로 정책을 바꿉니다. 강달러로 내수 시장 경기를 부양해 경기를 활성화한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달러 시세가 높아지면 해외의 투자자가 통화 시세 차익을 노리고 들어와 해외에서 유입되는 금융 투자 자산이 풍부해져 자산효과를 노릴 수 있었고 수입산 상품들이 저렴해져서 국내 소비를 진작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강달러 기조의 루빈 독트린을 ‘역플라자 합의’라고도 부릅니다.
미국의 달러가 강해지니 반대로 엔화는 다시 약세로 접어들었습니다. 다시 일본 제품들의 가격 경쟁력이 생기고 일본제 상품들이 해외 시장으로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수출품들은 비상이 걸렸습니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더 저렴한 일본 제품들에게 시장을 뺏긴 것입니다. 결국 수출로 먹고살던 한국 경제는 불황으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당시 한국의 대표 수출 품목이었던 철강과 반도체를 선두로 해외 수요가 줄어들면서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수출 기업들은 투자와 생산이 줄어들고 대출 빚도 갚지 못하고 자금난에 시달리는 기업이 늘어납니다. 이 중 가장 부채의 규모가 컸던 재벌 중심의 대기업들 또한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1997년 결국 연쇄부도가 터지면서 우리에겐 IMF 외환 위기로 유명한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보통 기업이 빚을 갚지 못했을 때 은행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기업이 만약 소생 가능성이 보인다면 오히려 돈을 더 빌려줍니다. 기업은 이 돈으로 당장의 자금난을 해소하고 사업을 정상적인 궤도로 다시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시 빚을 갚을 능력이 생기고 은행도 다시 수익을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기업의 소생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은행은 추가 대출을 해주지 않으며 빚을 돌려받기 위해 ‘채권 행사’에 들어갑니다. 은행이 빚 회수를 시작하면 기업은 살아남기 힘듭니다. 하지만 융자 규모가 큰 대기업이 도산하면 대규모의 융자를 출자한 은행은 물론이고 국민 경제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1997년 재벌 계열의 대기업들이 연쇄 부도가 나는 곳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기아, 대농, 해태, 진로, 뉴코아 등 30대 재벌 중 절반 이상이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습니다. 대기업이 쓰러지면서 거액의 돈을 떼 먹히는 일들도 연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대기업이 무너져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들이 증가하고 금융 기관들이 문을 닫는 상황에서 받을 돈을 떼인 사업자들 또한 갈 곳을 잃었습니다. 한국의 대외 신용도는 처참하게 떨어지고 불황은 1998년까지 계속 됐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본격적으로 외환 위기의 발생과 이후 반등하는 경기 회복까지 한국 경제 위기의 역사에 대해서 이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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